내용
우리 현대인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정밀하게 나누고 정확하게 측정하기를 추구하며 그 바탕 위에서 생활하고 있다. ‘추구한다.’라는 능동태를 쓸 수도 있지만, 강박장애의 정의에 더 맞게 표현하자면 ‘추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라고 수동태를 쓰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우리는 예전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쪼개진 시간과 공간의 단위 위에서 생활하고 있고, 감각기관으로는 감지할 수도 없는 정밀한 단위 위에서 모든 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소수점 아래 수십 자리까지의 단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공위성을 띄우거나 GPS 체계를 운용할 수 없으며, 반도체 회로는 나노 단위로 설계되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자제품으로 생산되고 있다. 오늘날 각국은 1초를 수십억 번 쪼개어, 1초의 소수점 아래 한 자리라도 더 늘릴 수 있는 정확도를 가진 원자시계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쨌건, 오늘날 우리가 ‘강박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 부르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들은, 현대인들의 이러한 특성들과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닮아 있다. 그들은 병적으로 정확함, 깨끗함, 안전을 추구하며, 스스로에게 과도한 도덕적 책임감을 지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강박장애가 ‘현대병’이라면, 현 시대의 우리가 정의하는 강박장애는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까지의 연구자들은 어떻게 그 증상들을 이해하고 정의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 보는 작업일 수 있다. 이 책은 강박의 두 가지 측면, 즉 현상과 개념의 측면 모두에 균형을 맞추어 ‘강박장애’를 살펴보고 이해하고자 한다.